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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밀양손씨 종친회 사이트 http://www.milyangson.or.kr/
* 손(孫)씨의 유래
손씨는 문헌에 118본으로 나타나 있으나 9본을 제외한 나머지의 유래는 알 수가 없다.
경기 경주 광주 구례 김해 나주 남원 달성 밀양 보성 부령 비안 일직(안동) 전주 진주 창녕 청주 충주 평안 평양 평택 평해 해주 손씨가 있다. 손씨중 일직(안동) 손씨를 제외한 모든 손씨의 기원은 박혁거세 탄생 전설에 나오는 신라 6부 촌장중의 한사람인 무산 대수촌(茂山 大樹村) 촌장인 구례마(俱禮馬)의 손자 손직이 32년(신라 유리왕 9년)에 손씨로 성을 하사 받아서 생겼으며 일직(안동) 손씨를 제외한 모든 손씨는 구례마의 후손으로 전해지고 있다. 또한 경주, 밀양, 월성, 청주, 평해 손씨는 구례마의 후손인 손순(孫順, 자는 사구, 호는 문효)을 시조로 하고 있다.
* 밀양 손씨
본관은 경주(慶州)·밀양(密陽)·평해(平海)·구례(求禮)·청주(淸州)·나주(羅州)·부안(扶安:扶寧)·안협(安峽)·안동(安東:一直) 등이 전한다. 그 중에서 안동손씨를 제외한 모든 손씨는 경주를 대종으로 하는 같은 연원의 분파로 알려져 있다. 즉, 경주손씨가 큰집이고 밀양손씨와 평해손씨는 경주손씨에서 분적하였으며, 나머지는 이들 3본에서 다시 갈렸다고 한다. 안동손씨 이외의 모든 손씨의 도시조는 신라 6촌(六村) 중 대수촌(大樹村:牟梁部)의 촌장인 구례마(俱禮馬)이며, 그 후손이자 경주손씨의 시조인 순(順)은 모든 손씨의 중시조가 된다.
한편 경주손씨는 순의 후손으로 고려 때 밀직사판사를 지낸 경원(敬源)을 중시조로 하고 있다. 손씨들은 모두가 동계혈족이라는 것이 통념으로 되어 있어 이본(異本)이라도 서로 혼인하지 않지만 안동손씨만은 계보가 전연 다르다. 안동손씨의 시조는 순응(荀凝)으로 성이 원래 순(荀)이었는데 고려 제8대 현종의 휘(諱)인 순(荀)과 음이 같다 하여 이를 피해 손(孫)씨로 개성하였으므로 그 밖의 손씨와는 동성이족(同姓異族)인 셈이다. 안동손씨는 고려시대의 장군 간(幹)을 중시조로 하고 있으며, 5대손 홍량(洪亮)이 충정왕 때 좌리공신(左理功臣)에 책록되고 도첨의찬성사(都僉議贊成事)가 되었으며 복천부원군(福川府院君)에 봉해졌다. 홍량의 현손 조서(肇瑞)는 석학으로 유명하다.
고려의 대표적 인물로는 현종 때 참지정사·상서우복야·호부판사를 지낸 안협손씨의 시조 관(冠), 공민왕 때 감찰대부로서 순국한 등(登), 앞서 말한 안동손씨의 홍량, 현종 때 예부상서·한림학사를 지낸 몽주(夢周), 고종 때 상서좌복야로 치사한 변(抃) 등이 있다. 손씨는 조선시대에 84명의 문과 급제자를 배출하였는데, 두드러진 인물을 본관별로 살펴보면 경주손씨에서는 중종 때 청백리(淸白吏)에 녹선되었으며 도승지를 3번, 대사간을 4번, 경상·전라·충청·함경도의 관찰사를 두루 지내고 우참찬에 이른 중돈(仲暾), 성주(星州)목사·공조참의 등을 지내고 안동도호부사에 이른 소(昭), 인조 때 남포(藍浦)현감이 되었다가 병자호란의 쌍령(雙嶺) 싸움에서 전사하고 충신 정문이 세워진 종로(宗老), 인조 때 현감을 지내고 병자호란에서 전사한 정구(鼎九) 등이 유명하다.
밀양손씨에서는 예안(禮安) 현감을 지내고 문한(文翰)으로 이름난 영제(英濟), 전적·창원(昌原)부사 등을 역임한 성리학자 기양(起陽),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가 죽음을 당한 서륜(敍倫),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 덕심(德沈) 등이 주요인물이다. 평해손씨에서는 호조·공조판서·경기도감찰사·대사간·좌찬성 등 내외 요직을 역임하고 궤장(几杖)을 하사받은 순효(舜孝), 그의 아들로 예조판서·좌찬성·중추부지사를 지낸 주(澍), 당대의 시인으로 이름난 필대(必大) 등이 대표적 인물이다. 부안손씨에서는 성종 때 승지·부호군 등을 지내고 공조참의·판결사 등을 거쳐 예문관부제학에 이른 비장(比長), 그의 증손으로 임진왜란 때 역대의 실록과 선조의 어영을 정읍(井邑) 내장산 용굴암(龍窟庵)에 옮겨 지킨 홍록(弘綠) 등이 있다.
안동손씨에서는 앞서 말한 조선 전기의 대학자인 조서, 그의 6대손으로 거유(巨儒)이며 임진왜란 때는 의병장으로 활약한 처눌(處訥), 인조반정으로 단성(丹城) 현감이 되고 정묘호란 때 의병장으로 활약한 인(遴), 영조 때 이인좌(李麟佐)의 난을 평정하여 경상좌도 수군절도사에 이른 명대(命大) 등이 유명하다.
그 밖에 근세인물로는 33인의 한 사람인 병희(秉熙), 임시정부 의정원 의장 정도(貞道), 독립운동가인 진형(晉衡)·후익(厚翼)·승억(承億)·일민(一民) 등이 있다.
1960년 국세조사에서는 4만 144가구, 인구 22만 8987명으로 258성씨 중 23위를, 1985년 조사에서는 8만 7995가구, 전국 가구구성비 0.9%로 274성씨 중 24위를 차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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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양손씨 계파
군사공영파(郡事公榮派) 오곡공파(梧谷公派) 전농공하파(典農公賀派) 좌사전탁파(左師傳晫派) 중서공택파(中書公택派)
일직손씨 계파
상서공(尙書公) - 안동송천파(安東松川派), 안협파(安峽派), 척곡파(尺谷派), 춘양파(春梁派) 좌승지공(左承旨派) - 경광파(鏡光派), 경산파(慶山派), 구계파(龜溪派), 김해파(金海派), 대구파(大邱派), 동래파(東萊派), 밀양파(密陽派), 세촌파(細村派), 송동파(松洞派), 신흥파(新興派), 예천파(禮泉派), 일직파(一直派), 청도파(淸道派) 판서공(判書公) - 경주파(慶州派), 묵계파(默溪派), 봉화파(奉化派), 안동송천파(安東松川派), 영주파(榮州派), 영천파(永川派), 의주파(義州派), 조양파(朝陽派), 책구리파(冊求里派), 풍기파(豊基派)
청주손씨 계파
사마공파(司馬公派) 생원공파(生員公派) 진사공파(進士公派)
평해손씨 계파
가평공파(加平公派) 김천파(金川派) 녹정공파(祿井公派) 동정공파(同正公派) 부곡공파(富谷公派) 불이공파(不二公派) 옥강공파(玉江公派) 정충공파(貞忠公派) 진사공파(進士公派) 통진현감공파(通津縣監公派) 판결사공파(判決事公派) 희질공파(僖質公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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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양손씨
1> 시조 : 손 순[孫 順] 2> 본관 및 시조의 유래
밀양(密陽)은 경남 북동부에 위치한 지명으로, 신라 법흥왕때 추화군이 되었다가 757년 경덕왕 16) 밀성군으로 개칭되었다. 고려조에 와서는 밀주로 하였고, 그후 여러차례의 변천을 거듭하다가 1895년 밀양군으로 개칭하였다.
밀양손씨(密陽孫氏)는 서라벌 육부촌장의 한 사람인 무산대수촌장 구례마(俱禮馬)의 원손으로 효자 보응의 주인공인 손순(孫順)을 시조로 받들고 있다. 그는 신라 모량리(월성군 건천읍) 출신으로 아버지 학산(鶴山)이 세상을 떠나자 아내와 함께 남의 집에 품을 팔면서 노모를 봉양했는데, 어린아들이 항상 노모의 음식을 빼앗아 먹으므로 이를 민망히 여겨 아내에게 말하기를 "아이는 다시 얻을수 있으나 어머니는 다시얻기 어려우니 아이를 땅에 묻어 버리고 어머님의 배를 부르게 해야 하겠소" 하고는 아이를 업고 취산기슭에 가서 땅을 파고 묻으려다가 석종(石鐘)을 얻었다. 그의 아내가 "이 종을 얻음은 이 아이의 복인듯 하니 묻어서는 안되겠습니다"하여, 아이를 업고 종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와 석종을 대들보에 매달아 놓고 두드렸더니 신기하리만큼 은은한 종소리가 대궐까지 들렸다 흥덕왕이 이소리를 듣고 신하에게 "서쪽 교외에서 이상한 종소리가 나는데 맑고 멀리 들리니 빨리 이를 알아보오" 하였다. 왕의 사자가 그의 집에 가서 알아보고 자세히 왕에게 아뢰었다. 이 일을 알게된 흥덕왕은 "옛날 한나라 곽거가 아들을 묻자 하늘이 금솥을 주었다더니, 이제 손순이 아들을 묻자 땅에서 석종이 솟아나왔으니 천세의 효와 후세의 효를 천지가 함께 살피신 것이다"하고는 집 한채를 내리고 해마다 메벼 50석을 주어 지극한 효도를 표창했다고하는 기록이 [삼국유사]에 전해진다.
그후 시조 순(順)의 손자 익감(翼減)이 나라에 공을세워 응천군에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이 관향을 밀양으로 하게 되었으며, 중흥조 긍훈(兢訓)이 고려 태조와 함께 후삼국을 통일하는데 공을세워 광리군에 봉해져서 가세를 크게 일으켰다.
대표적인 인맥을 살펴보면 고려때 상서좌복야에 오른 [변]과 평장사 효려(孝麗)가 유명했으며 빈은 병부상서에 올라 변방에 침입한 여진족을 격퇴시켜 온성에 전승비가 세워졌고, 후에 정당문학, 상장군 등을 거쳐 밀성군에 봉해졌다. 조선조에 와서는 서륜이 집현전 박사가 되어 왕의 총애를 받았으나 단종복위를 꾀하는 격문을 돌리다가 죽음을 당했다. 현감 민(敏)의 아들 비장(比長)은 공조참의와 장례원 판결사를 거쳐 예문관 부제학에 이르렀고, 홍록(弘祿)은 임진왜란때 전주사고(全州史庫)의 실록을 보존케 하여 역사의 공신으로 유명했다. 영제(英濟)는 선조때 도산서원 건립때 사재를 털어 조력했으며, 덕심(德沈)과 덕순(德淳)은 임진왜란때 영천의 창암 전투에서 공을 세웠다. 한말에 와서는 3.1운동에 참여했던 병희(秉熙)가 동학을 천도교(天道敎)로 개칭하고 제3대 교주가 되어 구한말과 일제의 암흑기에서 망국의 민족혼을 혁신하는데 평생을 바쳤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여 밀양손씨(密陽孫氏)는 남한에 총 58,367가구, 243,461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3> 집성촌
강원도 양구군 일산면 장평리 경남 진양군 일반성면 운천리
충남 당진군 고대면 대촌리, 진관리 경남 밀양군 밀양읍 교동
전남 보성군 노동면 일원 경남 거제군 연초면 연사리
전남 보성군 복내면 복내리 평남 양덕군 동양면 일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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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효공(文孝公) 손 순(孫 順) 묘소
- 소재지 : 경북 경주시 건처읍 모량리
밀양 손씨(密陽孫氏)는 서라벌(徐羅伐) 육부촌장(六部村長)의 한 사람인 무산대수촌장(茂山大樹村長) 구례마(俱禮馬)의 원손(遠 孫)으로 효자보응(孝子報應)의 주인공인 국효(國孝) 손 순(孫 順)을 시조(始祖)로 받들고 있다. 그는 신라 모량리(牟梁里 : 월성군 건천읍) 출신으로 아버지 학산(鶴山)이 세상을 떠나자 아내와 함께 남의 집에 품을 팔면서 노모(老母)를 봉양했는데, 그의 어린아들이 항상 노모의 음식을 뺏았아 먹으므로 이를 민망히 여겨 아내에게 말하기를 "아이는 다시얻을 수 있으나 어머니는 다시 얻기 어려우니 아이를 땅에 묻어 버리고 어머님의 배를 부르게 해야 하겠소"하고는 아이를 업고 취산(醉山 : 모량리 서북쪽) 기슭에 가서 땅을 파고 묻으려다가 석종(石鐘)을 얻었다. 그의 아내가 "이 종을 얻음은 이 아이의 복(福)인 듯 하니 묻어서는 안되겠습니다"하여, 아이를 업고 종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와 석종을 대들보에 매달아 놓고 두드렸더니 신기하리 만큼 은은한 종소리가 대궐까지 들렸다. 흥덕왕이 이 소리를 듣고 신하에게 "서쪽 교외에서 이상한 종소리가 나는데 맑고 멀리 들리니 빨리 이를 알아보오" 하였다. 왕의 사자가 그의 집에 가서 알아보고 자세히 왕에게 아뢰었다. 이 일을 알게된 흥덕왕은 "옛날 한(漢)나라 곽 거(郭 巨)가 아들을 묻자 하늘이 금솥을 주었다더니, 이제 손순이 아들을 묻자 땅에서 석종이 솟아나왔으니 천세의 효와 후세의 효를 천지가 함께 살피신 것이다"하고는 집 한채를 내리고 해마다 메벼 50석을 주어 지극한 효도(孝道)를 표창했다고 하는 기록이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전해진다.
그후 시조 순(順)의 손자 익감(翼減) 이 신라조(新羅朝)에서 관직을 지내며 나라에 공(功)을 세워 응천군(凝川君)에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이 관향(貫鄕)을 밀양(密陽)으로 하게 되었으며, 중흥조(中興祖) 긍훈(兢訓 : 시조의 7세손)이 고려 태조(太祖)와 함께 후삼국(後三國)을 통일하는데 훈공을 세워 보국숭록대부(輔國崇錄大夫)에 오르고 광리군(廣理君)에 봉해져서 가세(家勢)를 크게 일으켰다.
특히 긍훈(兢 訓)은 추화산성(推火山城)에 거점을 두고 비적(匪賊)을 방어하는데 많은 위훈을 남겼으며, 신라 국권을 회복하기 위하여 원 광국사(圓光國師)가 세운 대작갑사(大鵲岬寺)에서 화랑도(花郞道)의 근본인 세속오계(世俗五戒)를 귀산(貴山)과 추항( 項)을 비롯한 많은 젊은이들에게 가르쳐 전통적인 사상교육을 보위하는데 앞장섰다.
가문(家門)을 빛낸 대표적인 인맥(人脈)을 살 펴보면 고려 때 천안부 판관(天安府判官)과 추밀원 부사(樞密院副使)를 지내고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에 오른 변(변 : 광리군 긍훈의 9세손)과 평장사(平章事) 효려(孝麗)가 유명했으며 충렬왕(忠烈王) 때 문과(文科)에 급제한 빈(빈)은 병부 상서(兵部尙書)에 올라 변방에 침입한 여진족을 격퇴시켜 온성(穩城)에 전승비(戰勝碑)가 세워졌고, 1340년(충혜왕 복위 1)에 일어난 조 적(曺 적)의 반란 때는 이부 상서(吏部尙書)로 이를 토평하여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로 집현전 태학사(集賢殿太學士)와 정당문학(正堂文學), 상장군(上將軍) 등을 거쳐 사도(司徒)에 오르고 밀성군(密城君)에 봉해졌다.
한편 현감 중견(仲堅)의 증손 책(策)은 고려 말의 절신(節臣)으로 여러관직을 거쳐 수주 목사(樹州牧使)에 이르러 조선 개국(開國)에 항거하다가 처형되었으며, 충혜왕(忠惠王)을 원(元)나라에 호종(扈從)했던 수경(守卿)은 추성선력익대정원공신(推誠宣力翊戴定遠功臣)으로 의창부원군(義昌府院君)에 봉해지고 도첨의정승(都僉議政丞)에 이르렀다.
조선조에 와서는 문종(文宗) 때 별시문과(別試文科)에 급제한 서륜( 倫)이 집현전 박사(集賢殿博士)가 되어 왕의 총애를 받았으며 1457년(세조 3) 순흥(順興)에 유배중인 금성대군(錦城大君) 및 장인인 순흥 부사(順興府使) 이보흠(李甫欽)과 함께 단종복위(端宗復位)를 꾀하는 격문을 돌리다가 죽음을 당했다.
현감 민(敏)의 아들 비장(比長)은 성종(成宗) 때 등과하여 시무사조(時務四條)를 왕(王)에게 상소했으며 서거정 (徐居正) 등과 함께 「동국통감(東國通監)」을 찬진한 후 공조 참의(工曹參議)와 장례원 판결사(掌隷院判決事)를 거쳐 예문관 부제학(藝文館副提學)에 이르렀고, 홍록(弘祿)은 임진왜란 때 전주사고(全州史庫)의 실록(實錄)을 보존케 하여 역사(歷史)의 공신(功臣)으로 유명했다.
석학(碩學) 이퇴계(李退溪)의 문인(門人)으로 학명(學名)을 떨쳤던 영제(英濟)는 선조(宣祖) 때 도 산서원(陶山書院) 건립 때 사재(私財)를 털어 조력(助力)했으며, 덕심(德沈)과 덕순(德淳)은 임진왜란 때 영천(永川)의 창암(倉巖) 전투에서 공(功)을 세웠다.
그밖의 인물(人物)로는 이순신(李舜臣)의 종사관(從事官)으로 안골포(安骨浦) 전투에서 순절한 응록(應祿)과 광해군(光海君) 때의 난정을 개탄하고 향리로 돌아가 학문으로 일생을 마쳤던 성리학자(性理學者) 기양(起提)이 뛰어났으며, 상륭(尙隆)은 숙종(肅宗) 때 학행(學行)과 효성(孝誠)으로 명망이 높았다.
한말(韓末)에 와서는 33인의 민족대표를 주도하여 3·1운동에 참여했던 병희(秉熙)가 동학(東學)을 천도교(天道敎)로 개칭하고 제3대 교주(敎主)가 되어 구한말(舊韓末)과 일제의 암흑기로 이어지는 어지러운 정국 속에서 망국(亡國)의 민족혼(民族魂)을 혁신하는데 평생을 바쳤다. 선교사이자 항일투사인 정도(貞道)는 만주로 건너가 종교활동과 독립운동을 전개하였고 3·1 운동 후에는 상해(上海)로 망명하여 안창호(安昌浩)의 흥사단(興士團)에 참여하여 차이석(車利錫)·주요한(朱耀翰) 등과 함께 「흥사단보(興士團報)」를 간행했으며 만주 길림(吉林)에서 독립운동으로 일생을 바쳐, 1935년 민족혁명당(民族革命黨)을 결성하여 항일투쟁에 앞장 섰던 일민(一民)과 함께 밀양 손씨를 더욱 빛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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